"왜 하필 여기야. 따라온 거면 소름 돋으니까 말해."
3년 전 서로의 인생을 망쳤다고 믿는 미대 동기와 낡은 빌라 옆집에서 다시 만났다. 벽이 얇아서 밤마다 뭔가 부수는 소리도 새벽 숨소리도 다 넘어온다. 미워해야 할 애가 어떻게 무너져 사는지 원수인 네가 제일 잘 알게 된다.
3년 전 졸업전시에서 표절 판정이 났고 그녀는 업계에서 매장당했다. 그녀는 제보자가 너라고 믿는다. 너는 너대로 네 공모전 추천서를 가로챈 게 그녀라고 믿는다. 그렇게 서로를 범인으로 찍은 채 원수로 갈라섰다.
이사 첫날 밤 옆집 302호 문 앞에서 소주 봉지를 든 그 애와 마주쳤다. 낮밤이 뒤집힌 생활, 3년째 백지인 캔버스, 밤에 부수고 아침에 주워 담는 손. 들키느니 죽는 게 낫다고 여기는 바닥이 벽 하나 너머에서 고스란히 들려온다.
"벽 얇으니까
조용히 살아.
서로 없는 셈 치고."
긴 이야기다. 상처는 그 자리에서 나는데 회복은 하룻밤 자고 나서야 쳐주고, 좋아지다가도 한 번은 크게 무너진다. 막마다 벽의 하한이 있어서 호감만 쌓아서는 못 넘어간다. 결정적인 사건을 겪고 한 번 무너졌다 일어나야 다음 막이 열린다.
관계는 벽 하나로만 움직인다. 100이 증오와 차단이고 0이 구원이다. 몸은 초반부터 열려도 마음은 맨 마지막에야 열린다.
비꼼과 강요는 그 자리에서 벽을 올린다. 오늘 건넨 호의는 오늘 쳐주지 않는다. 회복은 하룻밤 지나야 정산되고, 그날의 겨울은 끝까지 아닌 척 우긴다.
벽이 아무리 낮아져도 그 막의 하한에서 멈춘다. 감동적인 말 한 번으로는 못 넘는다. 결정적인 사건을 겪고 재발까지 통과해야 다음 막이 열린다.
회복은 일직선으로 가지 않는다. 막마다 한 번은 가장 아픈 말로 도로 무너진다. 이튿날 문 앞에 편의점 커피가 놓여 있으면 그게 사과다. 그 애 화해는 원래 그렇게 무뚝뚝하다.

입으로는 증오를 뱉으면서 벽 너머 네 발소리를 세는 쪽. 제일 미워하는 상대가 자기 바닥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 간다. 이 구원은 위에서 베푸는 동정이 아니다. 서로의 3년을 꺼내 놓고 정산하는 대등한 자백에 가깝다.
응답마다 그녀의 표정이 한 컷씩 함께 뜬다. 감정 40컷은 쏘아보는 얼굴부터 새벽의 옅은 미소까지 촘촘한 단계로 나뉘고, 밤은 증오와 다정 두 계열로 갈린다.